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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프라하] 카를교 :: Karlův most / 체코 / 다리 / 인도교 / 블타바강

by Haechi J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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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교 (Karlův most)

 

영업시간 _ 상시 개방

휴무 _ 없음

입장료 _ 없음

연락처 _ 없음

주소 _ Karlův most, 110 00 Praha 1, 체코

좌표 _ 50°05'11.4"N 14°24'41.1"E

홈페이지 _ https://www.prague.eu/cs/objekt/mista/93/karluv-most

 

Karlův most

PŘEDCHŮDCI KARLOVA MOSTU           V místě mostu býval nejprve přechod přes svázané klády, tzv. prahy. V 10. století už je zmiňován dřevěný most, který ale býval ohrožován každou větší vodou, proto nechal Vladislav II. p

www.prague.eu

 


 

카를교는 체코 프라하를 가로지르를 블타바 강위에 있는 다리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인 카를 4세 때인 1357년 건설이 시작되어 1402년에 완공됨.

이후 440년 동안 프라하 올드타운과 그 주변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음.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돌다리 (Kamenný most) 라고 했지만, 1870년부터 카를교라고 부르게 됨.

1841년까지 프라하에서 블타바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기 때문에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주요 교역류트로 발전할 수 있었음.

 

길이621m에 넓이 10m인 다리는 상판을 지지하는 하부의 아치가 16개임.

3개의 탑이 있는데, 2개는 프라하성 쪽인 말라스트라나에 있고, 1개는 구시가지인 스타레메스토에 있음.

다리위 30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대부분 바로크 양식이고, 원래 1700년대 만들어 졌으나 현재는 진품이 아니라 모두 모조품으로 다 교체되었음.

 

카를교는 얀 네포무츠키(네포무크의 요한) 신부가 대주교와 대립하던 보헤미안의 왕 바츨라프 4세에 의해 처형 당한 장소로서 관광객들은 그가 떨어진 장소에 있는 그의 조각상을 만지며 소원을 빔.

네포무크 촌장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얀 벨플린(Jan Velflin)이라고 함.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가문의 이름 대신 [네포무크에서 온 얀]이라고 새개 했다고 함.

프라하 대학교에서 기독교의 교회법을 공부하다가 이탈리아 파도바로 건너가 유학하고 돌아와 사제가 됨.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와 프라하 대주교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 요한 네포무크는 바츨라프 4세의 두번쨰 부인인 바이에른의 조피왕비의 고해신부였음. 그러던 어느날 바츨라프 4세가 왕비의 잘못을 알아내기 위해서 네포무크를 불러서 그녀가 한 고해내용을 말하라고 했지만, 사제는 신이 금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며 거절함. 그 잘못은 어느 신하의 이야기에서 전해졌는데, 왕비가 자신에게 정부가 있었음을 고해성사 했는데, 이것을 신하가 엿듣고 왕에게 고자잘했던 것이고, 요한 네포무크는 정부의 이름을 말하라고 한 것이었음.

왕은 자신에게 그 내용을 말할 수 없다면 하나의 생명에게 말해보라고 했고, 옆에 있떤 개에게 귓속말을 했다고 함.

 

이 당시 국왕은 대립교황을 지지하고 있었고, 프라하 대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요한 네포무크가 클라드루비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원장 선거에서 상관인 프라하 대주교 쪽이 내세운 후보에게 투표하자, 바츨라프 4세가 그 즉시 병사들로 하여금 요한 네포무클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죽게 함. 이 당시 고문을 받다가 혀가 잘리기도 했고, 죽은 뒤 사체는 카렐교에세 블타바 강에 거꾸로 던져 졌다고도 하고, 일부 문헌에서는 동그랗게 결박당해서 발에 돌을 달고 강물에 던져서 생매장 했다고도 함.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유해가 발견되었고, ㅊ코에서 가장 큰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치됨.

 

이에 프라하 대주교는 교황에게 왕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아직 시성되지 않았던 요한 네포무크를 순교성인으로 칭하는 등 극도의 존경을 표시함.

추가로 말하자면 바츨라프 4세가 로마 교황에 대항하여 얀 후스를 지지했지만, 그가 처형당하자 후스 전쟁으로 이어짐.

 

카를교의 이름은 바츨라프 4세의 아버지인 카렐4세에게서 그 이름이 나왔는데, 그 곳에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이 세워짐.

1683년에 제작된 요한 네포무크의 성상이 세워졌으며, 그 아래에는 성인의 발자취를 새긴 2개의 부조가 있는데, 왼편에는 네포무크에게 고행하는 왕비를 디로 바츨라프 4세와 그 개가 조각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거꾸로 매달려 강에 떨어지려는 네포무크와 고개를 돌린 왕비가 조각되어 있음. 왼쪽의 부조는 개가 오른쪽 부조는 네포무크 신부 부분이 상당히 매끈함.

그 이유는 이 부분에 손을 대고 소원을 하나만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임.

 

카를교는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이 전서을 아는 사람들은 한번씩 손을 대기위해서 줄을 서기도 할 정도임.

물론,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을때는 여유있게 소원까지 빌만큼 시간이 충분하며 사람이 몰리지 않는 경우도 많음.

또한 카를교 난간 중 한 곳에는 십자가 모양의 표시가 있는데, 바로 요한 네포무크가 강으로 떨어져 순교한 자리임.

 

현재도 구 시가에서 프라하 성으로 넘어가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 카를교를 이용해서 도보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으며, 앞서 말한것과 같이 지나면서 동상과 부조를 만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음.

또한 많은 관광객이 있기 때문에 버스킹 등 거리 연주를 하는 사람이나 그림,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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